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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직공들이 떠났던 편력의 발자취를 따라서

중세 직공들이 떠났던 편력의 발자취를 따라서

1. 편력하는 직공

편력 방랑의 여행. 이것이야말로 독일 낭만주의가 즐겨 다룬 주제였습니다.

마침내 봄이 찾아왔다. 직공들은 마음이 들뜬다. 지팡이와 단검을 집어 들고 장인 앞에 나선다. "장인님, 청산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편력할 때가 왔습니다. 덕분에 이 겨울을 여유롭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좁고 침울한 거리에서 뛰쳐나가자. 따분한 일과의 되풀이를 시원하게 내동댕이치고, 시끄러운 장인과 변덕스런 안주인과 작별하고, 태양이 찬란하게 빛나는 광야로, 숲을 빠져나가 푸른 들판을 지나 높은 산마루로, 푸른 하늘 저편의 세계로 나아가자. 품에서는 절약하여 모은 돈이 소리를 내고 있다. 잘 있어라, 사랑하는 사람아.

독일의 문학과 편력직공의 노래 등에 이렇게 묘사된 편력직공의 세계는, 그것만으로 이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편력이야말로 제분공의 기쁨'이라는 노래는 일본에서도 많은 고교생이 불렀습니다.

편력은 18~19세기에는 청소년의 인격 도야를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동업조합 규약에는 직공의 편력 목적이 "젊고 경험이 없는 직공이 타국에서, 말하자면 남의 밥을 먹고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장인이 되기 전 행하는 수업의 여행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습니다. 확실히 젊은 직공의 새싹이 혼자서 미지의 나라로 떠나 그곳에서 직업을 구해 낯선 사람들과 섞여 일을 한다는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교육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편력이야말로 직공의 대학"이라고까지 일컬어졌던 것입니다. 많은 직공이 국경을 넘어 편력수업의 여행을 떠난 것은 확실히 독일 각지의 기술 수준을 끌어올려 균질화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편력의 결과이지 본래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동업조합의 규약은 표면의 장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독일 낭만주의의 매력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직공의 편력은 원래 훨씬 엄격한 사회 경제적인 조건으로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직공의 편력을 정한 최초의 규정은 1375년 함부르크의 피혁공 조합에서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아직 강제적인 의무가 아니고 직공의 자유에 맡겨져 있었습니다. 1389년의 뤼베크 신발공 조합에서도 장인의 자격 승인을 위한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 1년간 편력하는 것을 필수 조건으로 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두 가지 사례로 14세기 말에 직공의 편력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편력이 직공의 의무가 된 것은 일반적으로 15세기 중엽 이후입니다. 16세기에는 편력의 의무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1616년 바이에른에서는 법령으로 정해졌고 1731년에는 독일 전역에 걸쳐서 법조문화 되었습니다. 이윽고 19세기에 영업의 자유가 인정되면서부터는 편력의 관행도 줄어들지만, 석공조합 같은 데서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편력하는 직공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14~15세기에서 19세기까지 400~500년 동안이나, 독일의 직공들은 초기에는 북으로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에서 동으로 보헤미아, 헝가리, 발트 지방에서 러시아까지 그리고 17세기에 이르자 서로는 프랑스, 에스파냐, 남으로는 이탈리아, 북으로는 잉글랜드에 이르기까지 국경을 넘어 편력의 여행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독일 국내에서는 그동안에 연방이 분할되어 300개에 이르는 성, 속 제후가 서로 세력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서구 전역에 걸쳐 국민국가 태동의 기운이 넘치고 있던 이 무렵에, 유럽 사회의 저변에서는 무수한 직공들이 언어, 습관, 국적의 차이를 넘어 함께 일하고 여행하는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직공의 편력이라는 사회현상이 가져온 직, 간접적 영향은 대단히 컸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왜 편력의 길에 오르는가?

직공의 편력에 대한 연구는 매우 적으나, 우선 편력의 규모에 대해서 남독일의 콘스탄츠 시를 찾은 직공을 엿보는 데서 시작하기로 합시다. 편력직공은 원하는 도시에서 취업할 때 시참사회에 "시의 이익을 지키고, 손해를 입히지 않으며, 법률상 분쟁에 임해서는 시의 재판에 복종하고, 소환되었을 때는 즉각 시장에게 출두한다"는 것을 서약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남독일의 보덴 호반에 있는 콘스탄츠 시에 1489~1502년, 1519~79년에 걸친 편력직공의 서약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 서약서에는 편력해온 직공의 이름과 서약의 날짜, 출신지와 그 밑에서 배운 장인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15~16세기에 걸쳐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이 사료는 귀중한데, 이것을 분석한 G. 샨츠에 의해 다음과 같은 것이 밝혀졌습니다. 1489년에서 1579년 사이에(그 사이 22년간은 기록이 없다) 모두 3406명의 직공이 콘스탄츠에 편력해왔으며, 1489~1502년은 연평균 64명, 1519~27년은 약 66명, 1528~40년은 약 36명, 1541~51년은 약 82명, 1552~58년은 약 38명, 1559~62년은 약 60명, 1563~65년은 약 42명, 1566~79년은 약 17명이었습니다.

이런 유입 직공 수의 변화는 바로 콘스탄츠 시가 직면하고 있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1499년에는 이상하게 줄어서 35명이고, 1500년에는 엄청나게 불어서 106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1499년에는 콘스탄츠가 슈바벤 동맹의 일원으로 호아제 막시밀리안 1세의 스위스에 대한 전쟁에 참가하여 콘스탄츠 주변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1500년에는 평화의 회복과 더불어 전시 때의 몫을 되찾기 위해서도 새로운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1489~1527년은 직공 수로 보아도 번영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무렵 콘스탄츠에 황제의 궁전이 설치되고, 공식회의며 제국의회가 개최되는 등 시의 수입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또 1528~40년에 갑자기 직공이 격감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종교개혁에 따른 현상으로서, 1527년에 시작된 수도원의 해산, 사제가 강 건너 메르세부르크로 피신한 것, 가톨릭이 주변 지역과의 거래를 중지한 일 등에 기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편력직공의 수는 그 도시의 정치, 경제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증감했기 때문에, 거기서 반대로 시의 경제상황 등을 진단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독일의 남쪽 끝, 스위스와의 국경에 있는 이 도시에 편력해온 직공들의 출신지는 어디였을까요? 확인할 수 있는 출신지 중에서 네 명 이상의 직공을 콘스탄츠에 보낸 도시는 모두 160곳(총 2123명)이며, 이것을 지역별로 나누면 남쪽은 밀라노, 트리엔트 일대, 그 동쪽의 라이바흐, 유덴부르크, 그라츠, 헝가리의 클라우젠부르크, 브륀, 올뮈츠, 브레슬라우, 슐레지엔의 글로가우,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단치히, 힐데스하임, 마스트리히트, 룩셈부르크, 바젤, 제네바 등 넓은 범위에 걸쳐 있습니다. 베를린과 콘스탄츠 사이만도 750킬로나 되니 편력직공들의 노정이 얼마나 길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도별로 출신지의 경향을 살펴보면, 15세기 말~16세기 초를 경계로 출신지의 분포에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5세기 말까지는 콘스탄츠 주변에서 라인 강변 지대, 프랑켄에서 보헤미아까지의 지역에서 많은 직공을 보내고 있었으나 15세기 말 이후는 그 외의 지역, 특히 동유럽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같은 결론이 스트라스부르크의 직공 출신지에 관해서도 지적되고 있는데, 15세기 초엽까지는 라인 강 상, 하류지역이 직공의 주도니 공급지였으나 15세기 말부터는 동부전역에서도 직공이 유입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15세기 말에 이르러 독일의 전 도시에서 편력강제가 실시된 결과로 볼 수 있으나, 더 나아가서 편력강제가 각 도시에서 일반화된 원인을 생각하면 15세기 말에 독일의 여러 도시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경제 발전에서 일단 한계에 접근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편력은 결코 독일 낭만주의가 찬양하고 있는 것과 같은 자유로운 자기 교화, 수양을 위한 자발적인 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각 도시에서의 인구 증가가 한계점에 달하고 도세경제의 규모가 더 확대될 수 없는 단계에서, 동업조합은 장인 급을 일정 수로 한정했다 그래도 장인이 일을 계속하는 한 도제나 직공을 고용했고, 그 희망자도 많았습니다. 해마다 수업을 마친 직공은 배출되는데도 이제 당분간 장인이 될 가능성은 없어진 것입니다. 이 같은 상황은 직공에게 있어서 장래의 전망이 서지 않는 견디기 어려운 상태였을 뿐 아니라 장인과 동업조합, 나아가서는 시민 전체로 봐서도 중대한 사태였습니다. 시내에 불만에 찬 직공의 무리를 많이 끌어안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편력이라는 수단이었습니다. 수업을 마친 직공은 장인 승인 심사를 받기 전에 1년에서 7년 정도 각지의 동업조합을 찾아다니며 기술과 인생에 대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제안이 나온 것입니다. 실질적으로는, 아직 인구의 증가가 계속되고 경제 발전의 속도가 빠른 지역으로의 노동력의 일시적 이동이 제안된 셈입니다. 이리하여 초기에는 자발적으로 편력이 추진되다가 곧 강제적인 것이 되었고, 다시 법령화되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편력강제도 장인의 자식에게는 부과되지 않거나 기간이 단축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경제적 조건으로 규정된 현상인 직공인 편력은 14~15세기에서 19세기까지 독일의 도시와 사회를 살펴보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구 2~3만에서 고작해야 5만이 넘지 않는 중소도시에 독일 전역과 국외에서 직공들이 몰려와 함께 일을 했습니다. 직공의 출신지가 다르면 언어와 습관도 달랐으므로 그들은 타국의 언어와 습관을 배우고, 미지의 땅에 대한 전설과 공상적이고 신비로운 엣 이야기를 교환하여 언어, 민속, 문학에 걸친 문화의 공통적인 기반을 형성했기 때문입니다.

10대 후반의 아직도 미숙한 젊은이가 몇 해 동안 미지의 나라에 일하러 나가는 것이니까, 내보내는 부모의 걱정도 대단했습니다.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19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지침서에서, 아버지가 편력의 여행을 떠나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고 있습니다.

"아들아 유익하게 여행을 하려면 도중에 자세히 관찰할 수 없는 일에 몰입해서는 안 된다. 눈으로 보는 이상 무엇보다도 그것이 무엇 때문에 있고, 어떻게 하여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 알아야 하기는 한다. 흔히 사람들의 용모에서 그 사람의 사고방식을 알 수 있듯이, 대개의 도시나 나라에도 일종의 얼굴이 있어서 그것을 보면 그 속도 알 수 있는 법이다. 마을 안에 지나치다 싶을 만큼 주점이 많이 있으면 그곳에는 유쾌한 친구들은 많을지 모르나 가정의 행복이 작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해가 뜰 때 밭에 농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틀림없이 해가 진 지 오래인데도 많은 농부들이 술집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거지나 방랑자가 길가에 점심을 짓고 있는 것을 보거든 매우 조심해야 한다. 점심을 먹은 뒤 쉬고 있을 때 그들에게 붙잡히면 그들이 아주 잔인한 짓을 하는 수가 많단다. 도로에 잡초가 무성한 나라나 도시는 상업도 사람의 왕래도 적으니까, 일도 장인도 없을 것이다. 얼른 지나가버리도록 하여라. 노인이 집 안에서 일을 하고, 젊은이들이 휴일도 아닌데 밖에서 패거리를 짜고 있는 그런 곳은 파산한다고 보아도 틀림이 없다. 도시의 교회가 크게 솟아 있다고 해서 그곳 주민의 신앙이 깊다고 보아서는 안 되고, 마을의 교회가 아름답다고 해서 그것이 마을사람들의 신앙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 참된 신앙이란 겸허함이 넘치고 은밀한 법이니라. 농부가 비굴하게 손에 입을 맞추고, 지위 높은 사람을 만나면 길가 먼지 속에 몸을 굽히는 그런 곳에는 머물지 마라. 거기에는 폭군이 있게 마련이다. 궁전 주변에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이 늘어서 있는 곳은 빈곤의 소굴이고 굶주림이 지배한다. 행복한 것은 지배자 혼자뿐이고, 나머지는 울고 있는 나라다. 얼른 성호를 긋고 길을 서둘러라. 나라마다 지배자 여하에 따라 사정이 다른 경우가 많다. 지배자가 사소한 일에 성가시게 간섭하는 곳에서는 큰 문제에 대해서도 곰상스럽게 군다고 생각하면 된다. 경찰에 편력증명을 내보일 때, 그네들이 거만한 태도로 냉담하게 굴거든 침묵을 지켜 '주여, 이들을 용서 하소서'하고 속으로 빌면서, '너희들이 아무리 뻐겨봐야 결국은 불운을 겪게 될게다'하고 생각하여라. 아들아, 행복한 나라를 통과할 때는 신문에 보도되지 않는 일에 눈을 돌리도록 하여라. 길가에 과일나무가 심겨 있고, 황폐한 밭이 보이지 않고, 사람들이 타국인에게 친근히 인사하고, 네거리에 거지의 모습을 볼 수 없으며, 학교와 병원이 가장 아름다운 건물을 차지하고 있는 그런 곳이니라. 아들아, 내 충고를 따르도록 하여라. 남에게 대답을 할 때는 언제나 짧게 하고, 아는 것도 다 지껄이지 마라. 그러면 어디서나 친절하게 가르쳐줄 게다. 칭찬할 만한 일은 모두 찬양하여라. 그 대신 비난할 만한 일이라고 해서 다 비난해서는 안 된다. 타향 사람들 속에 끼어 있을 때는 근면하게 절약에 힘쓰고, 경건한 태도로 지식욕을 불태우며, 겸허하게 침묵을 지키고, 대담하지만 조용하게, 그리고 참을성을 갖도록 하여라. 그러면 언젠가는 동업사회에 도움이 될 인물 중 하나가 될 게다."

이 마음가짐의 글을 쓴 아버지도 전에 편력의 여행을 떠난 적이 있는 수공업 직공이었을 것입니다. 하층 직공들이 사물을 보는 눈과 그 윤리를 뚜렷이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교훈을 가슴에 안고 고향 도시를 떠난 편력직공들은, 직종에 따른 특징이 있는 모자를 쓰고, 허리에 단검을 차고, 지팡이를 들고, 배낭을 메고 있었습니다. 중세에는 직공을 구하는 도시에 대한 정보도 입소문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으므로, 편력직공은 같은 복장을 한 동료들로부터 정보를 얻어 저마다 목적하는 도시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고향 도시에서 장인이 될 전망이 적어서 타향에 운명을 개척하러 떠나온 것이니까 노자도 넉넉하지 않았고, 목적하는 도시에 직공이 일자리가 없으면 그 후의 노자를 구하기조차 어려운 것이 상례였습니다. 이럴 때에 편력직공의 의지가 된 것이 직공 자신이 속하는 조합이었다는 것은 유럽 사회를 아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3. 장인, 직공조합, 편력강제

동업조합은 뭐니 뭐니 해도 장인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이었기 때문에 직공에게는, 그 속에서 종속적인 지위밖에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장인은 직공과 도제를 지배하고, 직공과 도제는 장인을 섬긴다는 관계가 일관되어 있었습니다. 직공도 장인의 집에 함께 기거하고, 외박이 허용되지 않는 등 인격적인 구속을 받았습니다. 더욱이 중세사회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동료단체가 엮어내는 사회였으므로, 성대한 축제에 화려한 복장으로 행렬을 짜서 누비고 다니는 장인들을 직공과 도제들은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직공에게는 '노동의 명예'가 없었습니다. '노동의 명예'란, 그 직업에 종사하고 있음이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그것으로 존중을 받는 것입니다. 축제의 행렬에 빵집 동업조합이 행렬을 짜고 나아갈 때, 그 행렬에 참가하지 못하는 자는 제빵사로서의 '노동의 명예'가 없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14~15세기가 되자 장인이 될 전망이 줄어든 직공들은, 직공이라는 신분 그대로 사회적 지위의 상승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중세사회에서는 먼저 동료단체를 결성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14세기부터 각지의 동업조합 직공의 조직으로서 생긴 형제단이 그것입니다. 형제단은 본래 종교적인 조직으로서, 교회에 초를 봉헌하고 직공의 질병이나 사망, 빈궁할 때 서로 돕는 것을 목적으로 결성되어 있었습니다. 형제단의 결성에는 그것이 순수하게 종교적인 목적을 내걸고 있는 한 장인의 반대도 없었습니다. 원래 장인의 의무였던 직공의 질병과 사망 때의 원조가 형제단의 손으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교회는 신자의 증가에 의한 세력 확대와 수입의 증가 때문에 형제단을 환영했고 또 시 당국도 마침 기분 나쁜 정치력을 갖기 시작한 동업조합 내부를 갈라놓기 위해 직공의 조직을 승인하는 데가 많았습니다. 나아가서 대도시에서는 시민이 원래 시민의 의무였던 병역을 면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직공조직에 대신 그 일을 맡기는 경향이 있었고, 원정 같은 때의 직공 조직이 평시에도 그대로 남는 형태로 직공조합이 생기는 일도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직공은 이렇게 해서 자신들의 집회소를 갖고, 거기서 먹고 마실 수 있는 단체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종교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던 형제단은, 당연한 일이지만 세속적인 문제를 의논하는 자리가 되어갑니다. 1392년에 벌써 브레슬라우의 직공조합은 임금을 올려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 1495년 콜마르의 제빵조합 직공들이 성체행렬 때의 서열을 둘러싸고 시 당국과 다투어 근 20년에 걸쳐 파업을 감행했을 때, 주변의 직공조합은 콜마르에서 일하지 말라고 편력직공들에게 호소하는 한편, 콜마르의 직공들에게 계속 후원금을 보내주었습니다. 이 후원금은 이미 직공 형제단의 종교적 성격을 벗어난 것이라 하여 시 당국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직공조직을 강화, 촉진한 것은 편력강제였습니다. 14~15세기에는 각 도시 내부에 장인과 직공이라는 두 사회적 신분이 형성되어 심한 대립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한 도시에서의 대립 양상은 편력직공에 의해 즉각 각지의 직공들에게 전해져 콜마르의 경우처럼 직공의 단결에 의한 반항이 지역을 초월한 규모로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지역 간의 직공조직이 생겨 편력직공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편력직공은 그날 목적한 도시에 도착하면 같은 직업의 직공조합 전용 목로주점을 찾아가, 뒤에 언급하는 것처럼 신분증명을 보여주고 인사를 나눈 다음 그곳 직공의 안내로 장인을 찾아다녔습니다. 거기서 자리를 얻게 되면 시참사회에 가서 서약을 하고 그 도시의 직공으로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침 그 도시에 직공의 자리가 없는 경우 편력직공은 그곳 직공조합에 하룻밤의 숙식 및 얼마간의 노자를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 선물을 받은 직공은 사흘 안에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편력직공을 원조할 만한 조직을 가진 직공조합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조합과 뚜렷이 구별되었습니다. 이렇게 선물을 주는 일은 조합의 명예를 걸고 해야 했으며, 그것을 소홀히 하면 엄하게 비난을 받았다고 합니다. 편력직공은 이렇게 각 도시의 같은 직업 직공조합의 원조를 받음으로써 수백 킬로미터에 걸친 편력의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4. 글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경제적, 사회적 요인들로 인하여 장인이 되기 위해선 강제적으로 편력의 길을 떠나야만 했지만, 이러한 제도는 여러 지역에서의 경험, 여러 장인들로부터 받은 기술 전수들이야말로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장인이 된 사람들 또는 직공들에게 단지 전문적인 기술뿐만 아니라 수많은 경험과 인생의 통찰력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본 편력을 떠나는 아들에게 쓴 아버지의 편지로부터 알 수 있듯이, 중세 길드에 속한 직공들과 장인들이 사물을 바라보는 통찰력과 인생의 지혜가 풍부했음을 볼 때 더욱이 편력 제도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동하는 이런 편력의 직공들로 인하여 우리는 유럽의 문화가 더욱더 풍성히 형성될 수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편력 제도의 긍정적인 요인들을 적절하게 평가하여 받아들여 오늘날 장인의 자격을 주는 과정에 필수적으로 편력의 경험을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단지 우리가 한 직업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기술만을 연마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적절하게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도는 우리 학교가 바라는 인재와 기술자, 전문가와 장인들은 직업과 기술적 전문성뿐만 아니라 성숙한 인격과 인생의 지혜와 통찰을 갖춘 진정한 장인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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